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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풍선 하나 없는 산문만화 vol.001

말풍선 하나 없는 산문만화 대표 이미지



첫 번째 이야기 : 움직이는 궁전

낡은 전자앨범 속에서 이 사진을 다시 꺼내 보았다. 아마 마흔 중반 무렵이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스무 해쯤 전의 일이다. 사진 속 사내의 얼굴은 이제 내 얼굴이 아니고, 저 차 또한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저 사내를 낯설게 바라볼 수가 없다. 저 사람은 분명히 나였고, 저 차는 분명히 나의 집이었다.

첫 번째 칸에서 무학은 산을 바라본다. 어디를 보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눈길은 차 안보다 먼 곳에 가 있다. 그 시절의 나는 늘 떠날 준비를 하고 살았다. 한곳에 오래 머무르는 법이 없었다. 길이 끝나면 또 다른 길이 있었고, 산 하나를 넘으면 또 다른 산이 나타났다. 누군가는 그것을 떠돌이 인생이라 불렀겠지만, 나는 그것을 나그네의 삶이라 생각했다.

두 번째 칸에서 그는 차 뒤편에 앉아 있다. 남들이 보면 짐칸일 뿐이지만, 내게는 방이었다. 밥그릇이 있었고, 옷이 있었고, 책이 있었고, 잠자리가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집이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넓은 집이기도 했다. 그 집은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았다. 바퀴 네 개 위에 얹혀 비포장길도 오르고 산길도 건넜다. 어느 강가에서 멈추면 강가가 마당이 되었고, 어느 산자락에 서면 산이 곧 담장이 되었다.

세 번째 칸에서 무학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아마 피곤했을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청송군 산불감시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적힌 '청송군'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근무복의 표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시절 나를 먹여 살리던 밥줄이었다. 산불감시초소 20호. 내가 농담처럼 '무학봉'이라 부르던 그 산에서 하루 종일 능선을 바라보고 연기를 찾았다. 움직이는 궁전이 굴러가려면 기름이 필요했고, 기름값은 결국 누군가 벌어야 했다.

네 번째 칸에서 그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다. 나는 저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늘 저 사진을 들여다보며 한참을 생각해 보았지만 끝내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안다. 저 사람은 부자가 아니었다. 가진 것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부족하다고 느끼지도 않았다. 내 나라 어디든 갈 수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오늘 밤 잠자리를 스스로 정할 수 있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마지막 칸에서 그는 다시 먼 곳을 바라본다. 산불감시원 무학. 나그네 무학. 움직이는 궁전의 주인 무학. 그 모든 이름이 한 사람 안에 함께 살던 시절이었다. 다음 날 아침 안개가 끼든 비가 오든 맑든 상관없었다. 시동을 걸고 담배 한 개비를 물고 천천히 길 위로 올라서면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풍경을 만나고, 또 다른 하룻밤을 만나고, 또 다른 이야기를 만나면 되었다.

스무 해가 흘렀다.

저 차는 사라졌고, 저 얼굴도 사라졌다.

그러나 저 사내가 품고 있던 마음 하나만은 아직 남아 있다.

가난했으나 궁핍하지 않았고, 가진 것은 적었으나 세상을 넓게 가졌다고 믿었던 마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저 사진을 보며 생각한다.

저 차는 자동차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나그네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었고,
내가 스스로에게 지어준 이름 그대로,
'움직이는 궁전' 이었다.

생명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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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목을 무학의 목소리로 듣고 보려면

https://www.youtube.com/watch?v=EAlFA1wb6q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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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이 자리

생명의 눈으로 본 '픽셀과 기억' 연작 시리즈



잠시 머문 이때, 이 자리. 지금 나는 여기에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을 떠나면 지금의 이 자리는 그때의 그 자리가 될 것이고, 나도 이곳을 지나쳐 온 한 사람이 될 것이다. 아마 다시 오게 될 수도 있고, 다시는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머무는 대부분의 자리가 그렇다. 어느 순간에는 분명 내가 서 있고, 바라보고 있고, 숨 쉬고 있는 현재의 자리인데,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과거가 되어버린다. 그래서인지 지금 잠시 머물러 있는 이 시간이,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이 자리가 오늘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게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된 것 같다.

경북 안동시 길안면 단오공원이다. 공원 한쪽에는 학교가 담벼락 하나 없이 마주하고 있다. 학교와 공원이 이렇게 아무런 경계 없이 맞닿아 있는 모습이 오히려 정겹다. 아이들이 뛰어다니던 운동장과 오래된 나무들이 서 있는 공원이 서로 등을 돌린 채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한 공간처럼 이어져 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단오가 되면 길안단오제가 열렸을 것이다. 오래된 어른나무 아래에는 씨름판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모여 웃고 떠들었을 것이며, 높이 매달린 그네줄에는 누군가 올라가 힘껏 몸을 흔들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네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아무나 타지는 못하게 해놓았다.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을 즐겁게 하던 것들 가운데에는 이제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는 것도 생겼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저 그네를 타고 놀았을 사람들의 얼굴과 이곳의 오래전 풍경이 괜히 궁금해진다.

그런 곳에 지금은 나 혼자다. 이른 오후라 사람의 발길도 뜸하고, 주변은 조용하다. 오늘이 계절과 계절이 바뀌는 날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어제까지는 8월이었고 오늘은 9월 1일이다. 달력만 놓고 보면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된 날이다. 그래서인지 오늘이라는 날짜가 평소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그런데 막상 이곳에 서 있으니 계절이 바뀌었다는 실감은 별로 나지 않는다. 햇볕은 여전히 따갑고 공기는 눅눅하다. 잠시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사이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어느 것은 관자놀이를 지나 눈가까지 흘러내린다. 손으로 땀을 훔치면서 혼자 웃는다. 여름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건지, 가을이 아직 오지 않은 건지 알 수가 없다.

사실 계절이란 것이 달력처럼 딱 하루 만에 바뀌는 것은 아닐 것이다. 8월 31일 밤까지 여름이었다가 9월 1일 아침이 되었다고 가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무도 하루아침에 옷을 갈아입지 않고, 바람도 날짜가 바뀌었다고 갑자기 서늘해지지는 않는다. 아마 자연은 자연대로 자기의 시간을 따라 조금씩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사람이 편의를 위해 날짜를 나누어 여름이라 부르고 가을이라 부를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경계를 의식한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선 하나를 그어놓고, 이제는 가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똑같은 햇볕도 어쩐지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된다.

오늘 이곳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도 별것은 없다. 그저 잠시 둘러보고 있을 뿐이다. 오래된 나무를 보고, 씨름판을 보고, 매달린 그네를 보고, 건너편 학교를 바라본다. 그러다 땀이 나면 닦고, 다시 주변을 본다. 특별히 무언가를 하러 온 것도 아니고 누구를 만나러 온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런 시간이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천천히 보고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평소 같으면 차를 타고 지나쳤을 풍경이고,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가 금방 떠났을 자리인데, 혼자 있으니 오히려 오래 바라보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시간은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어서 특별한 시간이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온전히 나의 것이 되는 시간. 지금 이곳에는 나 말고는 아무도 없고, 나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서둘러야 할 일도 없다. 그래서 잠시 동안은 이 자리와 나만 남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계절이 바뀌는 첫날이라는 사실도, 이곳이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삶과 함께해 온 단오공원이라는 사실도 그 순간에는 모두 조용히 내 곁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이 시간도 곧 지나갈 것이다. 조금 후면 나는 이곳을 떠날 것이고, 이곳은 다시 나와 상관없는 일상의 한 장소가 될 것이다. 지금 바라보고 있는 나무도, 그네도, 학교도 그대로 남아 있을 텐데 그곳을 바라보는 나는 사라진다. 오늘 이 시간의 나는 오늘에만 존재하고, 내일의 나는 또 다른 곳에서 또 다른 시간을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이곳에 잠시 머물러 있다는 것이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서 아직도 여름 같은 더위를 느끼고 있지만, 그렇다고 가을이 오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조금씩,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계절은 이미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오늘의 더위도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고, 이마에 맺힌 땀도 마를 것이다. 오래된 나무도 또 한 계절을 건너갈 것이고, 그네줄도 다시 누군가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나도 이 자리를 떠난다.

잠시 머문 이때, 이 자리. 지금 나는 여기에 있다. 훗날 오늘을 떠올린다면 아마도 아주 짧은 기억 하나로 남을 것이다. 길안면의 어느 오후, 단오공원, 오래된 어른나무, 학교, 매달린 그네, 그리고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 별것 아닌 것 같은 장면들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별것 아닌 시간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곳이 내가 머물러 있는 전부이고, 이 자리가 내가 서 있는 전부다. 얼마 후면 그때의 그 자리가 되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이때이고, 이 자리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있다.

2026.09.01
생명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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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사이 달라진 산길의 풍경



AI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참 그럴듯한 글을 써준다. 햇살이 스며드는 울창한 숲, 푸른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 흙과 자갈이 섞인 산길, 그리고 숲 한가운데 조용히 놓여 있는 푸른 굴삭기. 자연과 기계가 공존하는 고요한 풍경이라나 뭐라나. 사진만 놓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빛과 그림자가 있고, 초록이 있고, 숲길도 있으니까. 그런데 그 사진을 매일 들여다보는 내 입장에서는 조금 웃음이 난다. 저 길이 AI가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평화롭고 낭만적인 길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은 내가 사는 외딴 산속길이다. 나와 구봉이, 그리고 두 동물만 사는 곳. 사람 하나 보기 쉽지 않은 이 산속에서 그나마 내가 의지하는 것은 이 길뿐인데, 요 며칠 사이 길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누군가 장비를 가지고 와 길을 넓힌다고 산길을 마구 파헤쳐 놓았다. 흙을 뒤집어놓고, 돌을 밀어내고, 멀쩡하던 길의 모양을 건드려 놓았다. 거기에 비까지 많이 내렸다. 그러니 파헤쳐진 흙은 물에 쓸려 내려가고, 여기저기 웅덩이가 생기고, 돌멩이는 드러나고, 바퀴가 지나간 자리는 깊게 패였다. 사진으로 보면 그저 ‘최근 작업의 흔적이 남은 산길’이지만, 실제로 그 길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 사람에게는 꽤나 골치 아픈 일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이륜차조차 제대로 다니기 어려운 길이다.

어제 올라오면서 차바퀴가 빠져나간 자국을 한참 바라보았다. 진흙을 깊게 파고 들어간 흔적을 보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어처구니가 없네.’

아마 이륜구동이라 한동안 꼼짝도 못 하고 흙더미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차가 힘이 좋으니 어떻게든 빠져나와 여기까지 올라왔겠지. 그 흔적을 보고 있자니 남의 차가 지나간 자국인데도 괜히 내 마음까지 덜컹한다. 오늘도 나갈 일이 있는데, 저 길을 다시 내려갔다가 올라올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겁이 난다. 예전 같으면 비가 오고 난 뒤 길이 조금 변한 정도로 생각했을 텐데, 이제는 차를 몰고 나갈 때마다 어디가 더 패였는지, 어느 쪽으로 바퀴를 붙여야 하는지, 저 흙더미는 피해 갈 수 있는지를 먼저 살피게 된다.

AI는 사진을 보고 ‘빛과 그림자의 춤’이라고 썼다. ‘자연의 숨결이 느껴지는 고요한 길’이라고도 했다. 맞는 말이다. 정말 숲은 아름답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순간은 여전히 좋고, 비가 그친 뒤 숲에서 올라오는 냄새도 좋다. 조용한 산속에 서 있으면 세상과 조금 떨어져 있는 듯한 기분도 든다. 다만 그 아름다운 풍경 한가운데에는 내가 매일 지나야 하는 길이 있고, 그 길이 지금은 엉망이라는 사실을 AI는 알 수가 없다. 사진에는 진흙에 빠진 차바퀴의 긴장감도, 오늘 나갔다가 다시 이 길을 올라와야 하는 사람의 걱정도 담기지 않는다.

그래서 사진을 다시 본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초록이 아름다운 숲길이고, 햇살이 예쁘게 내려앉은 한적한 산길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먹을 것을 사러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하는 길이고,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길이다. 이 길이 막히면 나도 이 산속에 꼼짝없이 갇힌다. 나와 구봉이가 사는 곳이니까.

참 이상하다. 같은 사진을 보고도 이렇게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AI는 그럴듯한 문장으로 이 산길을 아름답게 꾸며주었지만, 나는 그 사진을 보며 오늘 차가 또 빠지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누군가는 ‘숲 속의 조용한 길’이라고 부르겠지만, 나는 속으로 ‘제발 오늘만 무사히 지나가자’ 하고 중얼거린다.

누군가 건드렸고, 비가 많이 내렸고, 그리고 지금은 이런 상태다.

며칠 사이 달라진 산길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한다.

산다는 게 참 별것 아닌 것 같으면서도, 때로는 이런 길 하나 때문에 마음을 졸이는 일이기도 하구나.

그래도 오늘 나가야 할 일이 있으니 차에 올라탄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야 한다.

부디 오늘도 무사히.

나도, 구봉이도, 그리고 이 산길도.

2026.09.01
생명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무학

------ '동일 제목' 무학의 목소리로 들으려면------
https://www.youtube.com/watch?v=eFHBA-PJZXw

픽셀과 기억 vol.xx1, 요 며칠 사이 달라진 산길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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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동안 마당을 뜨겁게 달구던 햇빛이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 밖에 나갈 일이 있어 현관문을 열었다. 문 앞에 깔아 둔 미끄럼 방지 깔판 위에 뭔가가 비스듬히 놓여 있었고, 그 옆에도 무언가가 보였다. 내려서자마자 나는 무릎을 쳤다. 새였다. 작은 참새 한 마리가 마치 쉬고 있는 것처럼 가만히 누워 있었다. 얼핏 보면 잠시 쉬고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살아 있는 새가 아니라는 것은 금세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내 생각이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구봉이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나와 구봉이 사이에는 움직이는 서재가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참새는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곧바로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구봉이가 한 짓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단순하게 생각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구봉이는 뒷간 옆 개집에 묶여 있다. 그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새를 놀라게 할 수는 있어도, 잡아서 현관 앞까지 가져다 놓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다른 개를 떠올렸다. 칠봉이였다. 오래전 칠봉이는 장끼 한 마리를 잡아 현관 앞에 가져다 놓은 적이 있었다.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건 칠봉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칠봉이는 처음부터 목줄 없이 나와 함께 살았다.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쫓아다녔고, 잡을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잡았다. 사냥 실력이 대단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칠봉이는 이제 없다.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다. 구봉이는 절대 할 수 없는 일, 칠봉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었던 일, 그런데 칠봉이는 이미 없는 개라는 생각들이 한꺼번에 떠오르자 잠시 머릿속이 어수선해졌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참새를 살펴보기로 했다. 조심스럽게 손에 들어 올렸다. 마치 살아 있는 새가 갑자기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살포시 감싸 쥐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털이 뽑힌 흔적도 없었고, 피가 난 곳도 없었다. 어디에 물린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한쪽 눈은 감겨 있었지만 다른 한쪽 눈은 뜬 채였다. 마치 나를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 모습을 보다가 문득 몇 시간 전 일이 떠올랐다. 몸이 무거워 침대에 누워 쉬고 있었는데, 현관 쪽에서 갑자기 꽤 큰 소리가 들렸었다. 툭 하는 소리였다. 순간 누군가가 몰래 다가와 현관문을 건드린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뒤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소리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내 손 안에 있는 이 참새, 아마도 이 녀석이었을 것이다.

낮게 날아오던 참새가 현관 유리에 비친 바깥 풍경을 진짜 하늘과 공간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속도를 줄이지 못한 채 그대로 날아들었을 것이다. 참새에게 유리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유리 너머 보이는 나무와 하늘과 마당은 분명히 날아갈 수 있는 공간처럼 보였을 테니까. 그러나 그것은 공간이 아니라 벽이었다. 세차게 부딪힌 충격은 작은 몸이 견디기에는 너무 컸을 것이다. 그래서 상처 하나 없이, 피 한 방울 없이, 마치 잠든 것 같은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참 허망한 일이다. 참새는 인간이 만든 유리라는 물건을 알지 못한다. 자신이 보던 풍경을 향해 날아갔을 뿐인데 죽음을 만나게 되었다. 어쩌면 이 참새는 아주 험한 죽음을 맞은 셈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내 기분도 좋지 않았다. 살면서 이런 일을 몇 번이나 겪을까 싶었다. 현관문을 열었더니 방금 전까지 살아 있었을 생명이 내 앞에 누워 있는 모습 말이다.

운이 나빴던 것은 참새였다. 그렇다고 내가 운이 좋았던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우연히 그 죽음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그 참새 한 마리 때문에 나는 오래전에 떠난 칠봉이를 떠올렸고, 살아 있는 구봉이를 잠시 의심했으며, 지금은 손안에서 식어 가는 작은 생명을 바라보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생명 하나가 사라진 자리에 또 다른 기억들이 찾아온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그 참새를 손에 들고 서 있었다. 작은 생명이 남기고 간 마지막 흔적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2026.06.01
생명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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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머문 이때, 이 자리

지금 나는 여기에 있다.

잠시 후면 그때 그 자리가 될
이때, 이 자리.

스쳐 지나갈 곳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게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몇 해 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곳이었다. 처음 찾았을 때는 이미 꽃철이 지나 있었다. 아쉬움을 안고 돌아서며 다음 해를 기약했지만 또 기회를 놓쳤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보내온 사진 속 풍경이 눈길을 붙들었다. 강변을 따라 황금빛 꽃이 가득 피어 있었고, 그 모습은 내가 기억하던 곳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올해는 꼭 가보자고 마음먹었다.

전날부터 내린 비는 아침까지 가늘게 이어지고 있었다. 빗물은 실개천을 따라 흘러내려 더 큰 물줄기가 되고, 황토빛을 머금은 채 강으로 향하고 있었다. 흐린 하늘 아래 젖은 들판과 강가의 풍경은 오히려 더 깊은 빛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목적지에 가까워졌을 때 길은 막혀 있었다. 공사 중이라 차량 진입이 어렵다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방향을 돌렸고, 내비게이션도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좁은 골목길로 나를 이끌었다. 몇 번이나 길을 잘못 들었고, 어느 집 앞마당에서 조심스레 차를 돌려야 하기도 했다. 한참을 헤맨 끝에 결국 내비게이션보다 눈앞의 지형과 직감을 믿기로 했다.

강보다 높은 둑길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대강의 방향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돌아가고 또 돌아가며 마침내 둑길에 올라섰다.

그리고 그 순간, 찾고 있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둑 아래 넓은 습지와 강 언저리는 온통 금계국으로 물들어 있었다. 꽃들은 바람결을 따라 흔들리며 황금빛 물결을 만들고 있었다. 어디까지가 꽃밭이고 어디부터가 강변인지 경계가 흐려질 만큼 넓고 길게 이어지는 모습이었다.

올해는 정말 가장 좋은 때에 찾아온 것이다.

나는 꽃밭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꽃길을 걸은 것도 아니다. 몸이 허락하지 않기에 그저 둑 위에 머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 속에는 꽃 한 송이의 아름다움보다 더 큰 계절의 숨결이 담겨 있었다. 비에 씻긴 강변과 황금빛 꽃밭, 그리고 그 위를 스쳐 가는 바람이 한 장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오랜 시간 마음속에 품고 있던 풍경을 마침내 만난 날.

돌고 돌아 찾아온 길이었기에 더욱 반가웠고, 잠시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기에 더욱 소중했다.

2026.05.21

생명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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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를 한 시간쯤 남겨 둔 오전이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더없이 새파랗고, 보이는 풍경 또한 맑고 깨끗하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나와 구봉이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에서 허락된 하늘은 그리 넓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시거리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바람은 쉼 없이 설렁설렁 불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시원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시간인데도 벌써 볕의 기운이 만만치 않다는 뜻이다. 오늘도 계절은 제 걸음보다 조금 앞서가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봄과 여름을 달력으로 나눈다. 하지만 날 선 칼로 무 자르듯 그렇게 딱 잘라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과 날짜로는 아직 봄이지만, 내가 느끼는 오늘과 구봉이가 느끼는 오늘은 이미 초여름이다. 우리의 움직임만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올해 들어 줄곧 움직이는 서재를 두었던 포장 마당에서 자리를 옮긴다. 단풍나무 사이 그늘 밑이다. 조금 전 그 아래 서 보니, 볕을 정면으로 받던 원래 자리와는 확실히 달랐다. 바람의 결도 부드럽고 기온도 한결 낮았다. 그래서 나는 움직이는 서재를 그쪽으로 옮기기로 한다.

조심해야 했다. 지난해 가을쯤, 바로 그 단풍나무 사이로 차를 들이려다가 오른쪽 뒤 바퀴가 자갈 밑 흙을 깊게 파고들며 마당이 꺼진 적이 있었다. 아마도 가을비가 여러 날 이어졌고, 두껍게 깔린 자갈 아래 흙이 물러져 있었던 탓일 것이다. 자칫하면 차가 깊이 빠질 뻔했다. 그 일 이후 겨울과 봄이 지나도록 나는 마당 입구 가까운 단단한 자리만 고집해 왔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시동을 걸기 전 먼저 사륜 기어부터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로 물러 들어갔다. 네 바퀴가 자갈 위에 올라서는 순간 전해지는 감각은 시멘트 바닥과 확연히 달랐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단풍나무 가지 하나를 기준 삼아 차를 세웠다. 내려서 다시 위치를 살핀 뒤, 너무 깊이 들어간 듯하여 다시 한 미터쯤 앞으로 당겼다.

그렇게 자리를 잡고도 준비는 끝나지 않았다. 차문마다 촘촘한 망을 씌우고, 앞 유리에는 안쪽이 검고 바깥쪽이 은빛인 햇빛 가리개를 펼쳤다. 그러자 차 안은 볕이 완전히 차단된 깊은 그늘이 되었다.

나는 움직이는 서재 안 내 자리에 앉는다. 이동할 때 내 자리는 운전석이지만, 가장 오래 머무르고 가장 좋아하는 자리는 그 뒤편이다. 휴대용 테이블 위에 노트북이 놓여 있는 바로 그 자리. 내가 내 차를 '움직이는 서재'라 부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 자리에 앉으면 나는 단지 시간을 흘려보내는 사람에서 벗어나, 내 생각과 느낌과 마음과 눈에 들어오는 세상을 즉시 글로 옮기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 사이 구봉이가 보이지 않는다. 차를 움직이는 동안 녀석은 뜨거운 볕 아래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시원한 그늘 속으로 들어오자 어느새 자취를 감춘 것이다. 내가 있는 곳에서 구봉이 집까지는 스무 미터 남짓. 아마 녀석도 오늘 볕의 성질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녀석이 자리를 잡은 곳은 제 집 안이다.

몸 하나 겨우 누울 만큼 작은 개집. 안을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다. 텅 빈 공간 하나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문득 생각한다.

개라는 동물은 참 단순하고도 좋구나. 몸 하나 누일 자리만 있으면 되는데.

반면 내가 사는 집 안에는 왜 그리 많은 것들이 있는가. 아직 봄인데도 여름을 닮아 가는 오늘, 구봉이 집 안에는 부채 하나 없다. 선풍기 하나 없다. 그러나 내 집 안에는 부채도 여러 개, 선풍기도 여러 대다. 어차피 하나만 있어도 될 것들인데도 사람은 자꾸만 더 많이 쌓아 둔다.

그런데도 나는 시원한 집 안이 아니라, 단풍나무 사이 움직이는 서재 속 내 자리에 앉아 이런 생각들을 글로 옮기고 있다.

오늘의 날씨를 나도 알고 구봉이도 안다. 봄이지만 이미 여름 못지않게 덥다는 것을. 또 아직은 여름이 아니라는 사실까지도.

달력으로는 봄이 보름쯤 남아 있고, 여름도 아직 그만큼의 시간이 남아 있다. 그러나 날짜가 오늘 우리가 느끼는 계절의 경계가 되어 주지는 못한다.



2026년 5월 16일
생명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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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처음 본 것은 오래전 여름이었다.

 


2014년 7월 19일, 강원도 태백에서 월천해변으로 가던 지방도 416호선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길가에 잠시 차를 세우고 쉬다가 우연히 너를 보았다. 이름도 모르던 작은 덩굴식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고,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 뒤로 너는 낯선 자갈마당 한구석에서 해마다 다시 살아났다. 본디 네가 자라야 할 곳과는 전혀 다른 환경이었지만, 너는 가늘고 긴 줄기를 내어 묵묵히 버텼다. 너무 가늘어 꼭 굵은 실 한 올 같던 줄기는 바람에도 위태로워 보였고, 그래서 나는 늘 너를 보며 애처롭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건 사람인 내 쪽의 감상이었을 뿐, 너는 그저 네 방식대로 계절을 살아낸 것이겠지.

그리고 어느 해부터인가 너는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왜박주가리의 꽃.
작고 자잘한 적보라빛 별 모양의 꽃들은 가는 가지 사이에 드문드문 매달려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마치 하늘에서 별들이 꽃이 되어 떨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세상에 작은 꽃이 없는 것은 아니고, 내가 다른 꽃을 보지 못한 것도 아니지만, 너의 꽃은 내게 늘 특별한 아름다움이었다.

작년에는 몸이 좀 불편하다는 핑계로 너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타고 오르기를 좋아하는 너를 위해 줄 하나 제대로 쳐주지 못했고, 너는 의자 다리를 감아 오르며 겨우 볕을 받는 처지에서도 기어코 꽃을 피워냈다. 예전처럼 수많은 별꽃을 달지는 못하고 손으로 셀 수 있을 만큼만 피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오히려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때 나는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과연 내가 너를 사랑하고 좋아할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하고.

너는 그렇게 척박한 자리에서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데, 나는 네게 필요한 작은 도움 하나 제대로 주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작년 봄, 나는 너에게 조심스럽게 약속했다.
올해는 조금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겠다고.
그리고 어떻게든 책임지겠다고.

그리고 올해.
너는 또다시 자갈마당에서 살아났다.
여전히 너무 가는 줄기를 내어 어느새 한 뼘쯤 자라 있었다. 나는 작년에 했던 약속을 기억하며 이번에는 너를 위해 두 줄의 유인줄을 만들어주었다. 이제 너는 그 줄을 타고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는 와이어 빨래줄까지 닿아 양옆으로 길게 뻗어갈 테고, 다시 그 작고 아름다운 별꽃들을 피워낼 것이다.

나는 안다.
너는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저 주어진 자리에서 다시 살아갈 뿐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욱 너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해마다 다시 살아나 조용히 별을 피워내는 너를 바라보며, 나는 아직도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배우고 있다.



2026.05.17
생명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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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이 참 좋다. 게다가 바람도 거의 없다. 맨살에 닿는 햇빛은 따뜻하고, 그 곁에서 아주 약한 산들바람이 마치 기분을 맞춰 주듯 지나간다.

나는 지금 풀명자나무 앞에 앉아 있다. 가만히 바라보는 일도 어쩌면 하나의 일이다.

올해 이 나무는 유난히 달라졌다. 가지 끝들이 서로 이어지며 둥근 테두리를 만들었는데, 전체를 원으로 그려 보면 지름이 얼추 3미터는 되어 보인다. 꽃도 예년보다 훨씬 많이 피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열매가 커 가는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겨우 하나 달린 것을 만져 보니 아직 제대로 자라기도 전에 떨어질 듯 위태롭다.

사실 이 나무는 내가 알게 된 뒤로 늘 그랬다. 봄이면 화려한 꽃은 실컷 피우지만, 그 꽃들이 열매가 되지 못한 채 스스로 떨어져 버린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원인이 나무에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 보살핌이 부족했을 수도 있다.

풀명자나무는 현관 앞 자갈마당 한가운데 심겨 있다. 누가 봐도 좋은 자리는 아니다. 원래 사람 손을 타는 나무라는 걸 나도 안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거름을 주거나 약을 친 적이 없다. 그러니 어쩌면 사람으로 치면 영양이 부족한 셈인지도 모른다. 꽃은 피우되 끝까지 열매를 키울 힘은 없어, 모양만 살짝 보여 준 뒤 스스로 떨궈 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나무에 영양제를 뿌리거나, 벌레를 잡겠다고 농약을 칠 생각은 없다. 열매는 맺어도 좋고 맺지 않아도 좋다. 나는 이미 이 나무에게서 충분히 많은 것을 보았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며 눈을 키우는 것도 보았고, 그 겨울이 끝내 봄이 되어 꽃망울로 변하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터지듯 피어나는 순홍빛 꽃들도 보았다. 그 정도면 이미 나는 이 나무에게 받을 것을 다 받은 셈이다.

풀명자나무 아래에는 여러 풀이 자란다. 그중에는 쥐손이풀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쪽 자갈마당에는 쇠뜨기의 생식경이 거의 올라오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오래전 일과 관계가 있다. 아마 십 년도 더 되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이 자리의 쇠뜨기를 몇 해 동안 집중적으로 뽑아 낸 적이 있었다. 쇠뜨기는 워낙 질긴 풀이라 땅속 깊이 뿌리가 살아 있으면 해마다 다시 올라온다. 보통은 잎이 나오기 전에 생식경이 먼저 올라오는데, 지금 이쪽 쇠뜨기들은 그런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걸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쇠뜨기는 결국 땅속 뿌리의 힘으로 살아가는 식물이라는 것. 그래서 생식경만 잘 조절해도 번식은 어느 정도 사람 손으로 늦출 수 있다는 것.

오늘 나는 쇠뜨기를 뽑으며, 풀명자나무와 그 아래 자라는 풀들을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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